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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마음으로

어느 날 갑자기 유령이 나타났다

어느 한가로운 오후에, 나는 빵집 카운터에 엎드려 있었는데 갑자기 유령이 나타났다. 카운터에서 일어나서 담요를 가지러 갔다 돌아와 보니 내가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죽어서 몸을 빠져나온 영혼의 상태가 돼버린 줄 알았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될 줄이야. 하지만 곧 내가 죽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실망했다. 유령이 나타났는데도 놀라움을 느끼기보다 내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실망감을 더 크게 느끼다니. 카운터에 엎드려 있던 것은 나의 유령이었다. 너는 누구냐고 내가 묻자 그것은 나는 너라고 대답도 했다. 나는 유령과 멀리 떨어지게 되면 고통스러운 추위를 겪게 된다. 가까이 다가서면 추위가 점차 사라진다. 멀리 내쫓을 수도 없는 유령인 것이다. 유령은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을 똑같이 느끼지만 나에 대해서 아는 것은 전혀 없다. 왜 내 유령이면서 나에 대해 아는 게 없냐고 따져 물으니 자신은 방금 막 생겨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왜 생겨난 건지는 자신도 모른다고 한다. 유령을 없애기 위해 주기도문도 외워보고, 부적도 꺼내 봐도 소용이 없다. 유령은 그냥 나일뿐 악마도 유령도 아니라고 한다. 이렇게 유령과의 동거가 시작됐다. 유령은 내가 하지 못하는 것들을 해낼 수 있는 재주를 가졌다. 유령은 벌레와 물고기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유령은 집 안에 출몰한 바퀴벌레에게 나가 달라고 부탁해서 내보낼 수도 있다. 유령은 심지어 내가 퇴근길에 빵을 주던 물고기들이 감자 빵을 무척 싫어한다는 사실도 알아내서 나에게 알려주었다. 유령은 내가 느끼는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기에 복잡한 내 심정을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준다. 이렇게 깊은 이해와 공감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다른 누군가에게서 받아본 적이 없다. 그렇게 유령과 나는 친구가 되었다. 완전한 이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유령이 나의 감정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존재였다니. 이 기발한 이야기를 읽고 나는 부러움이 들었다. 나도 이런 유령을 친구로 두고 싶다.

책을 읽고 나서 거울을 들여다봤다. 거울 속에는 나와 똑같이 생긴 내가 보인다. 거울 속에 비친 나는 나일까, 나랑 꼭 닮은 유령일까? 뚫어지게 바라보다 보면 나를 향해 한쪽 눈을 깜빡이며 윙크라도 보내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계속 보게 된다. 계속 바라보다가 아무런 변화가 없어서 약간의 실망감을 느꼈다. 다른 일을 하다가 다시 거울 속을 바라보았다. 유령의 마음으로. 내 마음을 설명하지 않아도 깊이 이해해줄 수 있는 친구인 유령의 마음으로. 거울 속 내 눈을 들여다보니 힘겹게 인생을 잘 살아보려 애써온 내 모습이 보인다. 여전히 애쓰고 있는 그 모습에 연민과 깊은 이해가 느껴진다. 우리 모두가 이런 이해를 바라고 있는 건 아닐까? 앞으로도 살면서 종종 거울 속 내 모습을 들여다보게 될 것 같다.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며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눈빛을 보내는 유령을 만나기 위해. 내 마음을 이해해주며 눈물을 흘려주는 나와 꼭 닮은 유령을 만나게 될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보게 될 것 같다.

8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소설집

유령의 마음으로 8개의 단편을 단숨에 읽었다. 「유령의 마음으로」에는 총 8개의 단편이 있다. 8개의 소설은 짧지만 모든 이야기 하나하나가 기발하고 재미있다. 죽 읽어 나가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유령이 나타났다는 이야기의 소재가 오히려 평범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어떻게 이렇게 창의적인 이야기를 쓸 수 있었을까? 임선우 작가는 「유령의 마음으로」를 쓰면서 자신의 생각이 자유로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자유로워질 수 있는 듯하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서 하게 되는 이런저런 공상들이 자유롭게 이야기가 된 것 같다. 이 8개의 단편은 모두 일상에서 경험하는 짧은 순간들에서 영감을 얻어서 시작되었다. 침대 발치에 놓은 거울. 폐업한 가게 내부에서 죽어 가던 식물들. 방 안에서 내려다보던 새벽의 고속도로. 나무라는 이름의 나무. 이 장면들로부터 흘러나온 이야기들이다. 임선우 작가의 소설에는 따뜻함이 묻어있다. 유령의 마음으로 읽어보면 세상의 따뜻함을 좀 더 느낄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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